다리가 없는 새가 살았다. 이 새는 나는 것 외에는 알지 못했다. 새는 날다 지치면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잠이 들었다. 이 새가 땅에 몸이 닿는 날은 생에 단 하루 그 새가 죽는 날이다.
阿飛正傳 Days Of Being Wild, 1990
연기를 하고 싶어서 배우가 되고 싶었고, 배우가 됐는데 연기만 하는 게 배우가 아니더라고요. 요즘에는 프로란 무엇인지 계속 생각하게 돼요. 결국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계속 만들어나가야 되는 일 같아요.
선미는 ‘노트북도 있고 컴퓨터도 있지만 이렇게 해야 글을 잘 쓰는 것 같다’면서 연필로 글을 써요. 문득 3년 전 인터뷰 당시에 고은 씨가 꾸준히 일기를 쓴다고 했던 게 기억나더라고요. 지금도 여전히 일기를 쓰나요?
네. 어제도 썼어요. 그리고 얼마 전에는 일기를 쓰기 시작한 2008년도 다이어리를 꺼내 봤는데, 세상 어른이야.(웃음) ‘내가 이런 글을 썼다고?’ 싶기도 하고. 신기했어요. 어쩌면 지금보다 더 생각이 깊은 느낌? 그런 재미가 있더라고요.
지난 일기를 종종 보나요?
원래는 안 보는데 진짜 오랜만에 갑자기 보고 싶더라고요. 그때 <서툰 사람들>이라는 연극을 보고 왔다는데, 류승룡 선배랑 장영남 선배가 공연했던 거더라고요. 그거 보고 ‘아, 김고은 성공했네. 이제 다 인사하는 사이잖아’ 이러면서 뿌듯해하고.(웃음)
일기를 쓰는 건 어쩌면 그 순간의 나를 제대로 보관하고 싶은 마음을 반영한 행동일지도 모르겠군요.
지금도 일기를 쓰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는, 제가 심한 기계치라는 거예요. 컴퓨터도 잘 다룰 줄 모르고, 스마트폰을 연동해서 사진 보관하고 이런 것도 잘 못해요. 그래서 핸드폰 박살 나면 사진 다 날리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사진은 항상 좋았던 순간처럼 찍히는 거니 그 당시의 기억을 왜곡시킬 수도 있잖아요. 하지만 일기는 누군가에게 보여주려고 쓰는 게 아니니까 그 당시의 심정을 가장 솔직하고 꾸밈없이 쓸 수 있는 공간이라 생각하거든요. 심지어 맞춤법이 틀려도 상관없고,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처절한 소리를 써볼 수도 있고, 이런 재미가 있어요.
yes it is
<헤어질 결심>의 사랑은 무너지고 깨어지며 미결로 남으면서 완성되지만 완성되지 않는다. 극중 인물들의 감정을 어떻게 봤나.
탕웨이 서래는 생존 자체에 거의 모든 것을 바쳐야 했기 때문에 사랑을 할 여유도 없고 사랑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일반적인 연인처럼 사랑할 대상을 찾는다거나 온몸을 바쳐 사랑하겠다고 결심하는 일 자체가 불가능했다. 해준을 만나기 전까지는.
박해일 우리 영화는 사랑이란 단어를 직접 표현하지 않고 미묘하게 은유한다. ‘이게 박찬욱 감독님식 사랑인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관객마다 느끼는 타점도 다를 것이다. 생존이 중요한 서래와 직업에 자긍심을 가진 형사가 만난다. 어른들은 워커홀릭처럼 넘치는 에너지로 일에 몰두할 때도, 어느 순간 힘이 빠질 때도 있다. 해준은 자기도 모르게 주변부의 나사가 하나씩 풀리고, 단단했던 흙더미는 모래처럼 서서히 무너진다. 해준 캐릭터를 준비하면서 이런 기사를 봤다. 생존이 중요했던 어떤 여성이 자신을 조사하던 경찰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감정을 주고받았다. 나중에는 형사가 여자에게 돈까지 요구하며 협박을 했다고 한다. 이 사건을 접하고 <헤어질 결심>도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해준이 서래에게 친절해야 하는 이유라 든지 이들을 둘러싼 사회적인 측면도 생각하면서 캐릭터에 보다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탕웨이 <헤어질 결심>은 <안개>라는 노래에서 출발했다고 들었다. 도대체 감독님은 그 노래에서 무엇을 느꼈기에 이런 영화를 만든 걸까. 어른이 된 사람들의 굉장히 깨끗한 첫사랑이 아니었을까. 정훈희의 목소리에는 미망(迷妄)과 따뜻함, 신비로움이 모두 담겨 있다. 사실 이 얘기는 박찬욱 감독님과 더 나눠보고 싶다. 박찬욱 감독님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정말 다양한 색깔의 세계가 존재하는 분이라고 생각했다. 굉장히 직접적이고 극단적인 표현 방식을 보여줬던 박찬욱 감독님에게 <안개>가 어떤 의미이기에 <헤어질 결심> 같은 영화를 만들게 된 건지 정말 궁금하다. 이건 정말 꼭! 물어볼 거다.
박해일 사실 사랑이라는 범주 하나로만 엮어낼 수 없는 영화다.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갈래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해준과 서래를 둘러싼 사회적 맥락과 그들의 힘들고 찌든 삶이 얽히고 설키면서 더 넓은 의미를 만든다. 서래가 해준을 맑은 물 같다고 생각한다면, 해준은 미망인으로서 서래가 보여주는 태도가 일반적이지 않다는 점을 직업적으로 의심하는 동시에 인간으로 호기심이 발동한다. 호기심에서 동질감으로, 그리고 호감이 생기는 묘한 화학 작용은 내가 처음 연기해본 것이다.